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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교재, 바오로딸 성경학교 학사 전반의 궁금한 사항을 문의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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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드립니다
작성자 교육원 작성일 2019-09-11 조회수 247
박병규 신부님을 대신하여 교육원에서 답글을 드립니다.

역사라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역사라 말할 수도 있지만, 또 얼마든지 다르게 ( )의 역사, [ ]의 역사... 식으로 다양하게 변주해 표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문우답>과 <성서입문 하권>을 참고하여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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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태어난 곳은 전쟁의 소용돌이가 그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물과 목초지,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고대 근동의 민족들은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살던 팔레스티나는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열강들의 패권 다툼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들의 삶은 폭력과 전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상의 삶처럼 되어버린 이스라엘인들이 하느님을 ‘만군의 주님, 힘센 용사, 임금, 견고한 성채’ 등으로 묘사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 그리고 자신들과 주변 민족들의 관계도 전쟁 용어를 빌려 설명하고 이해하였습니다.

민수 3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족을 쳐 이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병사들은 미디안의 장정들을 모두 죽이고 임금들도 다 죽입니다. 또 사로잡아 온 아이들 가운데서 사내아이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들 가운데서도 처녀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죽입니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학살을 저지를 수 있었던가? 더구나 이 전쟁은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나옵니다(25,16-18). 민수 21,1-3에서 이 같은 대량 학살은 ‘완전봉헌물로 바치다’라는 동사로 표현됩니다.
‘완전봉헌’은 포로는 죽이고 물건은 완전히 파괴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의 셈족들은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 군대의 수장이 어떤 종류의 노획물은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정된 노획물은 다른 군인들이 차지하거나 다른 용도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주님이 그들 군대의 수장이시므로 노획물의 일부나 전부를 그분께 바쳐야 했습니다. 주님이 군대의 수장이 되셔서 싸우는 전쟁을 성전(聖戰)이라 합니다. 실제로 모세오경에서 가장 오래 된 시(詩)인 탈출 15장의 승리의 노래를 보면 하느님이 ‘전쟁의 용사’로 묘사됩니다.
성전(聖戰)은 민수기뿐 아니라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에도 나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성전(聖戰)의 기록들을 후대의 독자들에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창립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그들은 성전(聖戰)을 주님과 가나안 신들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민족과 민족 사이의 전쟁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이었으므로 패배한 민족은 자기네가 섬기는 신을 버리고 승리한 민족의 신을 섬겨야 했습니다. 성전(聖戰)을 그토록 끔찍한 대량 학살로 묘사한 이유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야훼 신앙을 포기하고 가나안의 허수아비 신들을 받아들이고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聖戰)에서 요구하는 대량 학살과 완전파괴가 앞에서 예를 든 민수 31장의 기록처럼 언제나 철저하게 시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기록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거나 먼저 나온 것으로 보이는 신명 20장은, 완전봉헌에 몇 가지 제한을 두어 성전(聖戰)의 잔혹함을 부분적으로 완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민수기 저자도 첫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행군 중에 있는 주님의 군대로 여기며, 이 군대의 목표로 복수가 아닌 성결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여호수아기에도 가나안 점령 과정에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것도 야훼 하느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비호 아래 이루어집니다. 어떤 성경 독자들은 여호수아기의 이 같은 잔혹한 기록들에 충격을 받거나 혼란에 휩싸입니다.
이 문제는 여호수아기가 저작 연대의 신학적 명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의 저작 연대는 바빌론 유배가 끝날 즈음이니 작중 연대와는 거의 600여 년의 차이가 납니다.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함락을 목격하고 남의 나라 땅에 사로잡혀 와서 살던 유다인들은 민족적 대재앙 앞에서 깊은 반성을 합니다. ‘하느님이 왜 우리 백성을 치셨을까?’ 그 대답은 ‘주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그것은 가나안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풍습과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유배가 풀려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다시는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가나안의 모든 것과 철저히 단절해야 하겠다’는 신학적 명제가, 여호수아기 저자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것으로 묘사하게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기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폭력의 신으로 간주하거나 자신들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이민족들을 잔혹하게 학살해도 무방한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전(聖戰)에서 요구하는 대량 학살과 완전파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죄악으로 보이겠지만 ‘전사로서의 하느님’ 개념은 이집트 탈출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기초를 다진 그들의 가장 오래 된 체험에서 나온 만큼, 이스라엘의 기원적 역사를 인정하는 한 이 개념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전쟁 문화 속에서 자라났고 그들의 일상이 늘 전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전쟁은 실로 그들 삶의 일부였습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라는 2사무 11,1의 서술에서 우리는 고대 근동의 민족들이 전쟁을 연례행사처럼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상의 삶처럼 되어버린 이스라엘인들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니 자연 싸우는 이야기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전쟁과 싸움이 멈췄던 적은 없는 듯하니까요.

덧붙일 점은 구세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 민족으로 태동을 막 거친 여호수아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으로 치면 부모의 사랑과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아기와 같습니다. 이 시기 부모는 아이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이나 철저히 막고 배제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시기가 되면 부모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聖戰)의 개념은 예언서에서 점차 퇴색됩니다. 전쟁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평화를 누리고 온전한 믿음을 갖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이사 7,1-14; 예레 21,3-10; 34,1-5; 호세 10,12 이하 등). 구약의 예언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주님이 아니라 이제는 이방인들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구원의 보편주의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배경 안에서 이해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21세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안목으로 볼 때 폭력을 허용, 또는 조장하고 자신에게만 절대복종을 요구하는 다소 부정적인 모습의 신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정적인 신의 모습과 더불어 한없이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모습도 함께 자리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시는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신입니다.
이 두 상반된 하느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성경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문화적 한계와 약점을 노출시키는 표현과 생각이 곳곳에 나옵니다. 전쟁 문화를 배경으로 그려진 하느님의 모습도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쟁 문화의 부정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끝까지 성실한 사랑과 자애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성경 전체에 생생히 드러납니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 하나만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민족을 다 쓸어버리시는 잔혹한 신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편협한 국수적 민족주의가 빚어낸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의 표본으로 이해하면, 문제는 쉽게 풀려 나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당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자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택하시어 그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성경 저자들은 자기네 삶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들이 소개한 하느님은 자기네 조상들에게 한번 약속하신 내용을 성실하게 이행하시고, 마침내 자신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과 폭력의 이야기 한가운데서도 당신 백성에게 성실하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모습은 언제나 변함없이 부각됩니다. 말하자면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이야기들은 성경의 본 내용이 아니라 본 내용을 담고 있는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 있어서 많은 경우 고문서와 고고학적 발굴이 밝혀낸 바로는 구약성경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가벼운 폭력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전혀 폭력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흔히 구약의 폭력과 전쟁 이야기들은 ‘주 하느님께서 이처럼 크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다 생생하고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하느님 안에 부정적 모습과 긍정적 모습이 공존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경 저자들이 결코 제3자의 객관적 입장에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은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 서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하다 보면 역사적 실제와 다른 표현이나 과장이 곁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편협한 민족주의의 안목 때문에 다른 민족들의 생존을 가볍게 다룰 수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경을 성인전처럼 생각하시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사람과 거룩한 일화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거지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는 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는 전쟁, 미움, 복수 등으로 얼룩진 우리네 삶의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불완전한 인간을 하느님께서 끝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시고 성경을 다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참고도서 :
<현문우답>(정태현 지음, 바오로딸)
<성서입문 하권>(정태현 지음, 한님성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