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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작성자 교육원 작성일 2019-03-25 조회수 280
① 창세 1,26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라는 표현은 하느님이 여럿이라거나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으로 고백하는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회의할 때의 모습을 하느님께 유추 적용한 표현(1열왕 22,19; 욥 1,6; 2,1; 38,7 참조)으로서, 하느님이 깊이 생각하시고 그 결단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② 인간과 동물을 ‘흙’에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 그의 동반자가 되게 하십니다. 갈빗대로 번역된 히브리어 ‘첼라’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의 원시 사고, 곧 그들이 남자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가슴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가슴에는 히브리인들이 사고와 감정의 중심으로 생각하던 ‘마음’(렙)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는 남자의 가장 고귀한 부분에서 생겨났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 용어의 배경에는 신화적인 개념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갈비뼈(ti)에 통증을 느낀 엔키 신은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여신을 창조했는데, 그녀가 ‘닌티(Nin-ti, 갈비뼈의 여자)’입니다. 수메르어 ‘티’는 ‘생명을 주다’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갈비뼈의 여자’는 ‘생명을 주는 여자’와 같은 뜻입니다.
‘생명의 여자’가 갖는 다른 의미는 ‘하와’라는 용어를 통해서도 그대로 표현됩니다. 이때의 하와는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서 ‘하와’를 ‘조에’, 곧 ‘생명’으로 옮긴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담에게 여자는 ‘생명’이며 ‘생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여자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여자가 어디에서 생겨났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명확히 말하는 바와 같이 아담은 ‘여자’와 완전한 의미에서 동등성을 지닙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이쉬’)에게서 나왔으니 여자(‘잇샤’)라 불리리라.”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살도록 배려하셨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은, 아담과 동일하면서 아담에게 적합한 인물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은 동물들 가운데서 그런 짝을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잇샤’, 곧 동일한 본성을 지닌 ‘여자’에게서만 행복을 느끼고 통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저자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와 서로 간에 통교를 나누는 일치의 공동체를 구분하며 그 차이점을 매우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아담은 동물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 살지만, 얼굴을 맞대고 통교하며 행복을 느끼는 유일한 존재는 여자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참고도서 : 박요한 영식, 이야기로 배우는 모세오경, 생활성서)

③ 범죄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대가는 출산의 고통, 인간과의 경쟁관계, 자연과의 부조화와 고된 노동 등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는 즐겁고 행복했던 관계와 노동이 하느님께 불순종한 후로 부조화와 고통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 참고도서: 김정훈, 모세오경, 바오로딸)

④ 창세기의 설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 대해 마거릿 누팅 랄프의 『구약성서 기원 발견하기』(바오로딸)를 참고하여 써드리니 좀 긴 내용이지만 공부 삼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창조가 시작될 때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강의와 교재를 통해 배우신 것처럼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진리를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진리’와 과학적 또는 역사적 사실을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우셨을 테니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진리들은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함하며, 그것들은 우리의 존재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행위는 무엇인가? 등등,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쉽게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신비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성경이 쓰여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그들의 고유한 체험을 들여다보았겠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체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이런 체험과 사건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을 계시하시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자신의 영적 통찰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 특별한 종류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신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저자가 이해를 넘어서는 실재를 말하기 위해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그 진리가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에 저자는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저자가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이야기가 ‘진리가 아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자는 그가 사용하는 뚜렷한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역사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신호를 우리에게 보냅니다.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의 나무, 그리고 말하는 뱀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이야기가 상징을 빌려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다룹니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관찰은 저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가? 고통이라는 현실이 사랑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는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는 이런 의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뿌리는 죄라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고통은 하느님이 선고한 벌이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배고픔, 나약함, 심지어 죽음도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신화’(혹은 설화)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아셨으면 하와의 출산이란 문제 제기 자체가 불필요함을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 참고도서: 마거릿 누팅 랄프 지음, 임숙희 옮김, 『구약성서 기원 발견하기』,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