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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기

성경, 교재, 바오로딸 성경학교 학사 전반의 궁금한 사항을 문의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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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답하기 게시판입니다.

교육원에서 답변 드립니다.
작성자 교육원 작성일 2018-06-19 조회수 308
질문자의 글은 '성경에 포함된 기독교의 큰 도덕적 결함'이 있으니 기독교당국이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또 다음 몇 가지 항목이 성경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질문을 찬찬히 잘 읽어보면, 성경을 세세히 읽으시며 많이 생각하셨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다만, 먼저 전제로 해야 할 몇 가지 큰 원칙에 대해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 성경은 신앙체험과 거기서 비롯된 삶을 통해 오랜 세월 내려온 신앙고백의 글입니다.

일반적인 '이야기(신화, 소설, 역사...등)'와 장르가 다릅니다. 종교의 경전으로서, 인간 이성과 언어 능력이 더 이상 갈 수 없는 차원, 곧 신비를 다룹니다. 따라서 비유와 상징이라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2. 성경은 당대의 문화, 역사,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서 핵심 메시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문화, 사회적 기준으로 잣대를 세우면 오류가 생깁니다. 2,000년 전이라는 시간은 상상하기 힘든 고대입니다. 그 시대에 비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3. 문맥을 통해 올바른 의미를 건져야 합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듯이, 같은 표현이라도 앞뒤, 이야기 전체의 흐름에서 '무슨 이야기를 결국 하려는가'에 초점을 둔 해석이 아니면, 말 꼬투리 잡는 비판이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 질문자의 물음은 모두 언어적, 문서적 비판의 차원에 있습니다. '도덕적 결함'이라는 기준을 세우셨는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도덕은 차이가 큽니다. 하물며 고대 근동의 2000년 전이라는 시기를 지금에 놓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권의 차이를 보면, 말씀하신 성폭행, 곧 동정녀 잉태 이야기는 제우스 신화를 연상케 합니다. 제우스 신화에서는 신이 인간 여인을 범해서 신과 인간의 혼합능력을 지닌 자손이 태어납니다. 인간계를 지배하는 신이 보통 이상의 능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경전인 성경은 동정녀 잉태를 이야기하는 목적이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경전과 신화의 차이입니다.

- 경전은 비유, 상징을 통해 '신의 신비'를 열어보입니다. 질문자의 '지옥형벌'에 대한 비판은 우선 지옥을 '장소' 개념으로 출발합니다. 그런 장소는 없습니다. 화가나 이야기에서 이해되도록 사용하는 이미지, 상징, 비유입니다.
지옥은 공간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부재의 상태, 관계 결핍'을 내용으로 합니다. 예수님은 이 관계 회복의 유일한 길로 인간이 그 출발점인 하느님께 온전히 되돌아가는 것(그 상태가 천국, 영원한 생명입니다)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신비이고, 지금 여기에서 인간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다 이해되고 올바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입니다. 신앙은 학문과 다릅니다. 인간이 다 이해한다면 하느님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한계가 시작되는 그 자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께서 신앙이란 무엇인지 먼저 정리해보시고 성경을 연구하시면 논의가 가능한 질문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예수님이 '부자를 증오'한다는 지적은 사회,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했지만,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가난이지, 열등의식을 가질 불가피한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목수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장인계열이라 중간 정도의 생활수준이었다고 역사가들은 설명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한 치유와 기적만으로도 출세하고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돈 받고 부자들만 상대했다면요.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과도 식사하시고 부자(회당장, 백인대장..)도 가난한 자도 다 고쳐주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기 어렵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풍족할 때, 아쉬움이 없으니까 하느님을 안 찾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우리 사회의 재벌 갑질을 보십시오. 자신이 하느님처럼, 왕처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하는 것이 갑질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느님 앞에 겸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믿으려면 이웃을 형제처럼 여겨야 하는데...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제자들도 부자와 가난한 이들, 유다인, 이방인들.. 차별 없이 함께 어울렸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아리마태아 요셉 등 부자, 니코데모같은 권세가들이 제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에도 왕실 관리(마나엔=헤로데 친구), 부유한 이들이 많아서 선교를 도왔습니다. 부자도 부자나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그 단락은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로 마무리되는데, 질문자께서는 그 구절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그 구절이 핵심입니다.

- 끝으로 맥락을 반드시 챙겨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몇 구절을 오려내어 그 표현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심각한 오류를 가져옵니다.

질문하신 '가족관계-패륜'의 마태 11장 34절과 48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삶이 주제입니다. 하느님께 응답하는가, 아닌가의 갈림길에 서면 가족처럼 친밀한 관계 안에서도 선택의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방식을 선택할 때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분리)의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현실에서도 그렇지 않은가요? 재산이나 갈등이 불거질 때, 가족 사이에도 선택에 따른 갈라짐이 생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맥락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가족 안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등진 것 같은 가족도 결국은 하나로 모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패륜이 아니라,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큰 사랑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