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딸 성경학교 문의
우편 성경공부 02)944-0819~23
이러닝 성경공부 02)944-0840~42
(정규 과정/단과 강의)
새로나는 성경공부 02)944-0969
이메일: uus@pauline.or.kr
문의 시간: 9:00~18:00
                   (토·일요일/공휴일 휴무)

묻고 답하기

성경, 교재, 바오로딸 성경학교 학사 전반의 궁금한 사항을 문의하는 공간입니다.
(단, 게시글이 홈페이지 성격과 맞지 않는 내용일 때에는 운영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묻고 답하기 게시판입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작성자 교육원 작성일 2017-06-19 조회수 721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지금 문득 떠오른 제 개인적인 생각은, '비그리스도인들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판단하실 것'이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응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 가톨릭청년성서모임에서 만든 <꼬다케>라는 책에 이에 대해 비교적 쉽게 풀어쓴 글이 있어 그 내용을 전부 여기에 옮겨 적고자 합니다. 가감 없이 전부 적어드리는 것이 이해하시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다 옮겨도 되나 싶었지만 공개 질문과 답글이 아니기에 적어봅니다.)

* <꼬다케> 제2권 p.44-p.48에서 인용:

구원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결과 그분과 진정한 화해를 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이 구원으로 초대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셨고, 이분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요 사제로서 구원의 유일한 중개자가 되신다는 것이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세우신 교회 안에 속하는 것은 개개인에 대한 구원의 충만한 표지이자 필수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한편으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교부들은 교회를 통한 구원의 절대성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라는 집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하며 이 집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의 공의회에서도 당시 유럽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고 교회를 통한 구원의 절대성을 강조했고, 이는 오랫동안 교회가 교회 밖을 향하는 시선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밝힐지는 몰라도 우월적인 자세와 호교론적인 태도로 비춰져 왔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입장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도 비오 9세는 다른 종교, 특히 개신교의 교세 확대에, 모든 종교 형태의 동일한 위치를 주장하는 입장에 반대하기 위해 “신앙 안에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로마 교회 밖에는 아무도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고수해야 한다. 그 교회는 구원의 유일한 방주이고 그 속으로 들어서지 않는 자는 홍수 속에 빠져야 한다”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세상을 대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려는 입장은 현대의 교황인 비오 12세에 와서 전환되었습니다. 비오 12세는 가톨릭 신자들만이 참으로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이지만 “아직 가시적 교회의 일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희망과 원의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질서지어져 있다”는 말로 갈라진 형제들의 구원 가능성을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에 들어 이러한 입장의 전환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칼 라너라고 하는 신학자는 무신론들에서도 발견되는 그리스도적 삶의 형태를 주목하면서 특히 무신론자들의 신에 대한 거부적 태도에 있어 그 원인과 동기가 다양함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의 유형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기도 했는데, 첫째는 참다운 신앙과 실천이 따르는 유형, 둘째는 하느님에 대한 객관적인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신론적인 실천을 행하는 유형, 셋째는 신에 대한 인식은 없지만 양심을 따르는 결단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유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신론적 인식과 아울러 행동마저도 양심을 거스르는 유형입니다. 라너는 이중에서 세 번째 유형을 또한 무죄인 경우라고 보고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 중 하나로 등장했으며 실제로 교회 안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논의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구원에 대한 입장의 전환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구원에 대한 입장의 변화는 다른 종교나 세상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도 전환됐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입장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수렴되어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며 구원을 위한 보화들이 교회 안에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불리한 여건의 경우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 인구에 비해 하느님 백성의 수는 아직 소수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알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러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16)

공의회에서 자기 탓 없이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는 비그리스도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는 그 존재 가능성을 타종교인과 심지어 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범주에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종교 형제에게 존경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들 종교에서 수천 년 동안에 걸쳐 하느님을 추구해온 소리의 반향을 들을 수 있으며 비록 하느님을 추구하는 내용은 불완전하지만 진지하고 바른 마음으로 찾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종교들은 마치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 있는 것과 같아 복음화의 준비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현대의 복음선교 53 참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참된 것은 그들 모두를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교회헌장 16 참조).

우리가 세상과 구원을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개신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하느님을 믿으나 교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다음이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어떠하다고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인간적인 이해가 개입되는 이러한 이야기보다는 정말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구원의지 본래의 의미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언제,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고 계속해 나가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확인은 선교를 위해서나 세계 인구에 비해 적은 수의 교세를 정당화하려는 인간적인 필요성에서 온 것이 분명 아닙니다. 이는 다른 종교와 세상을 대하는 데 있어 교회가 독단론을 벗어나 그들을 포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자세로 전환했음을 의미합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입니다. 그들을 한 형제로 보며 그들에게서 구원을 위한 보화를 발견하려는 개방성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가 왜 필요하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분명히 교회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구원계획의 도구입니다. 교회 내에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구원을 위한 보화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와 세상을 향한 징표로서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구원의 길이고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구원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비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해 놀랄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교회 입장의 전환이 다른 종교를 믿어도 결국은 구원될 것이라거나 모든 종교는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알면서도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거나 거부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그 안타까움만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중한 것을 알리고 그들이 완전한 구원으로 함께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선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지 그들을 대하는 데 있어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시각을 반성하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 밖의 구원 가능성과 함께 ‘세례를 받아서 교회에 머물러 있으나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교회헌장 14 참조)고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구원에 더 가까이 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없는 사랑은 공허합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 중에 사랑을 실천하며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구원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며 분명 우리에 대한 자극입니다